김진관 개인전 _ 텅 빈 충만 - 유약한 식물들이 창출하는 생성의 여백 (2018. 6. 6 – 6. 19)


2008년은 김진관에게 있어 작업 세계의 변곡점이었다. 당시 일상 속 한 사건이 그로 하여금 “아내의 병간호와 더불어 자연의 작은 열매나 하찮은 풀 한 포기라도 그 외형 이전에 존재하는 생명의 근원을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순간을 다음처럼 기록한다: “재작년 늦가을 서울 근교로 스케치를 다녀왔다. 오후 바짝 마른 잡풀들을 밟는 순간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러 들풀들의 씨앗들이 튀겨 나갔다. 자세히 보니 짙은 갈색과 붉고 다양한 씨들이 앞 다투어 터뜨려지고 있었다. 그 소리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이는 마치 동양화 화선지 위에 긴 호흡을 한 후 필연적인 점들을 찍는 것 같았다. 퍼져가는 공간의 선과 점이며 시점이었다.” (김진관 작업노트, 2010)
이 사건은 작가 김진관에게, 이전에는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던 미물(微物)들로부터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 새로운 화제(畵題)를 만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순간에 비로소, 소멸되어 가는 미미한 존재들로부터 생성의 의미를 발견하고, 생명의 근원을 성찰하는 체험적인 계기를 맞이한다. 그 생명의 근원은 시간의 관점에서, 흙 속에 자신의 몸을 내어 주고 스스로 썩어서 새로운 생명을 발아시키는 씨앗의 변화되는 삶으로부터 왔다. 그것은 또한 공간의 관점에서, 하나의 점으로부터 여러 점으로 산포(散布)되는 씨앗들의 편재되는 삶과 더불어 하나의 완만한 선으로부터 자신의 분신들을 복제해 나가는 풀잎들의 기억하는 삶이기도 했다.
그렇다. 근 10년 동안 작은 곤충의 크기를 거대하게 키우면서 생태에 대한 문제의식에 천착하던 작가가 2008년 전환의 변곡점에서 새롭게 모색하기 시작한 것들은, 깨, 콩, 팥과 같은 씨앗들이거나 마른 곡물의 이파리들, 낙엽, 억새 잎들과 잔뿌리가 붙어 있는 이름 없는 잡초들이었다. 그의 작품 세계가 생태라는 거시적 담론으로부터 자연이 남긴 부산물, 유약한 자연물이라는 미시적 담론으로 응축하고, 구체화된 것이다.
‘텅 빈 충만!’ 씨앗과 마른 풀잎들이 화폭 위에 고독하게 자리하면서 여백을 커다랗게 만들어 놓거나, 반대로 빈 공간을 가득 채우는 그의 화폭 속에서 우리는 ‘비우기 위해 채우는(혹은 채우기 위해 비우는)’ 날숨과 들숨의 순환의 자연 원리를 배운다. 무한한 자연 속에서 보잘 것 없고 소소한 자연물은 어느덧 커다란 대자연과 우주를 자신의 몸 안에 품는다. 씨앗이나 풀잎처럼 소소한 것들인 소우주가 연동시키는 대우주를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손금과 경락(經絡)이 이미 대우주의 운행 원리와 연동되듯이, 혹은 ‘쌀 한 톨 속에 벼 전체의 이치가 있다’는 주자(朱子)의 비유처럼, “한겨울 모진 추위를 이겨낸 억새풀이나 만추의 씨앗”은 이미 대우주의 운행과 연동되는 생명의 ‘공생(共生)적 응집체’로 자리한다.
‘텅 빈 충만!’ 작가 김진관의 작품 세계에는 이처럼 비움 옆에 채움을, 소우주 옆에 대우주를 연결하면서, 타자와 연결하여 주체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피아(彼我)의 세계관으로 가득하다. ‘피아’란 사전적 의미로 “그와 나 또는 저편과 이편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내 손은 내 몸으로 연결되는 소우주이고, 내 몸은 대우주로 연장되는 소우주이다. 그렇듯이, 작가 김진관이 자신의 작품 속에 드러내는 피아의 세계관은 언제나 자연의 미물들이라는 소우주가 공기, 빛, 대자연이라는 타자의 세계와 교류하면서 ‘텅 빈 여백의 공간’ 속에 자연의 근원적 고향인 대우주를 넉넉히 품어낸다. 즉 유약한 자연의 미물들을 통해서 넓디넓은 ‘생성의 여백’을 만들고 그곳에 ‘텅 빈 충만’이라는 동양적인 우주관과 미학을 담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할 것이다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