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Creating Oikos
Art Critic, HUR Nayoung
I go through a lot of “relationships” from waking up in the morning with seeing the sunlight to falling asleep after whole day. I am connected by nets of relationships not only with my family and society but also with any passenger to meet in the commute bus. Is it only for human being? I sometimes faced with piquant winds as front door opening, leaves of shaky trees, and grasses between paving blocks. I can know to be a point in the relationship network on the viewpoints of religion or science. SUNG Min Woo’s grasses have faced with each other on her canvas.
Ecology
SUNG Min Woo binds grasses and human beings with “relationship ecology.” The grass relies on each other like human being. The relationship appears in her works with leaf vein like human. Because one being is hard to sustain its life, they should be closely related for themselves. As humans cannot be totally alone, the grasses should rely on each other to survive for themselves in the harsh land. SUNG Min Woo called this ecological herd “Oikos.”
The oikos refers to an individual group in contrast to the public domain, the Polis, in ancient Greece. Since then, the word has become a name primarily referring to religious herds. The “Oikos,” SUNG Min Woo saying, is a grass herd to survive the grasses each other with emotionally connecting by themselves even they have individual lives. As the child relies on her mother and the friends are gathering and chatting, the human beings have kept their herds friendly and valuable to bet their lives. They look like the grasses to keep their lives together in any cramped space or on a corner of stark asphalt. The gasses are not worthless organisms, but herds to keep their lives for her.
Time & Space
The grasses in her works are not the usual grasses. However, they do not represent a great people or a human existence. It is not a tremendous story, but it is also not something we can ignore. The grasses in her canvas shine brilliantly golden light with their characteristics. The grass can be a life by itself and an oikos by creating life network together. Therefore SUNG Min Woo gave the time and the space to the grass oikos.
It is at the end of this year, winter of 2016. The grasses in her works come from the spring, summer, and fall of this year. She does not never draw the grass in her memory even she is one of semi-specialists of the grasses. She has collected and drawn the grasses within near her space, which have been living the time. The dal-ma-ji in the “Oikos-time” could not blossom with lack of rains in this especially hot summer. It is not lacking in appearance, but surprising to survive during this hot summer. The dal-ma-ji shines the golden light and keeps its position in her works. The time has been kept with the lives of the grasses during drawing this work. The sun and moon in the left and right of “Oikos-time” like il-wol-o-ag-do have represented the time of the oikos.
The oikos can be a space. The grasses have their own spaces like the family expressed as “house” space. The oikos space is a place we have not thought of yet: below my foot; any corner of deserted houses; stark and small land by streets. The hwan-sam-deong-gul in the “Oikos-space” is one of the most notorious naturalized plants. Therefore it just takes its roots off the hard-to-grow ground where people cannot reach with its strong vitality. The vitality has been shown as a figure of alive stems by SUNG Min Woo. There are many grasses in the space and they made their own world looking away from the blue sky, who are me-kkoch, dal-ma-ji-kkoch, soe-mu-leup, go-deul-ppae-gi, dal-gae-bi, etc. The oikos time and space show that the grasses have life. SUNG Min Woo sees the human figures from the grasses in this way: it is hard and peaceful according to the time of life; it is to throw someone away from the herd because it is just different. She has a question why don’t human beings live without trampling or disparaging anyone according to their own circumstances, like the grasses live their lives according to their given circumstances.
and Creating Oikos
Artist's affection for the grasses is to make communication between the artist and the grasses. It seems that the grasses are asking the artist to make their oikos in her works like the artist gives new lives to the grasses. With this way the garden was created and the forest was created also. However, SUNG Min Woo’s oikos is on-going now.
Winter is coming and the grasses are concentrating their vitality hiding their roots in the ground until next spring with warm shining. These lives will come up again on the earth, with leaves, flowers, and seeds. SUNG Min Woo’s oikos will be continuously moved like the ecology of the grasses with endless their lives. Her first oikos is the herd of grasses with red vein for their lives. The next is for the grasses to have their own colors and golden light. And then, the strength of the grasses is enhanced with covering by gold foils. The gold foil covered leaf side except its vein and stem. However, the metal characteristics of gold foils can enhance the leaf veins and stems. Through this new approach I can see SUNG Min Woo’s activities and know that now is not the completion of her oikos, one of her intermediates created by herself.
SUNG Min Woo’s oikos can be the grass oikos with energy-concentrated red veins, the peaceful world looking at the blue sky, the inside of time with the sun and moon, the garden with a worm, or the forest made of the leaves faced with metal surface. I expect to see SUNG Min Woo’s next works because her works are on-going and progressive now. But sometimes I have feeling with worries of what I stay in the oikos and lose the way further. What I have expectation and worry to see the grasses in her oikos is that life of human being is located on the uncertainty by herself. Why don’t you have a waiting for the next her oikos like exciting in the future coming soon?
바닥에서 빛나는 풀, 그리고 삶
허나영 (미술평론)
나에게 있어 풀은
그들의 삶을 바라보고
그들의 방식을 이해하고 싶고
그들을 연민하고
그들을 담고 싶은
그런 대상이었다.
작가 노트 중-
어둠 속에서 자란 풀
검은 바탕 속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풀. 그리고 풀로 만들어진 형상과 풍경. 그 어두운 단순성과 강렬한 복잡성의 대비는 우리를 화폭으로 끌어당긴다. 이 어둠 속에서 피어난 형상은 무얼까. 이 장소는 어디일까. 화폭으로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모호한 공간 속에 들어가게 된다. 힘차게 꿈틀거리는 붉은 곡선들과 초록, 노랑의 형형색색의 선들은 그림 속 형상이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형상은 풀이다. 우리가 길가에서 매일 마주하는 풀 말이다.
길가 아스팔트를 뚫고 연석 사이를 비집고 나와 존재를 드러내는 풀, 소위 잡초라 불리는 이 풀들은 일상에서는 우리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간혹 민들레가 홀씨를 머금을 때가 궁금증이 잠시 스칠까? 이 내세울 만한 꽃도 향기도 없는 이 풀들을 아무도 보아주지 않고 누구도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 움터 싹으로 줄기로 잎으로 자라난다. 그저 자신에게 간간히 주어지는 빗방울과 흙의 온기만으로 말이다. 그리곤 일 년도 채 나지 못하고 사그라진다. 돕는 이 없어도 스스로 생명을 움트는 풀의 자생력. 그러한 풀의 생태를 성민우는 검은 화폭에 담는다.
찬란한 금빛풀이 만든 인간의 삶, 그리고 관계
검은 바탕 위에 홀연히 드러난 풀의 모습은 가까이 다가 갈수록 마치 신기루처럼 보인다. 멀리서 보면 풀들은 명확하게 어떠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지만, 화폭에 가까이 갈수록 그 형상의 윤곽은 바탕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검은 색의 아래에서 언뜻언뜻 느껴지는 금빛과 형상의 곳곳에 새겨진 금색 선들이 합쳐진다. 그 위에 붉은 잎맥과 푸른 잎들이 뻗어가고 있다. 화폭의 풀들은 분명 이름이 있는 것들이다. 여뀌, 냉이, 민들레, 왕고들빼기, 질경이, 큰방가지똥, 강아지풀, 환삼덩굴... 비록 잎맥의 붉은 색이 과장되기도 하고, 벌레가 먹은 잎도 있지만, 화폭 속 풀들은 분명 현실에 존재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풀들에서 성민우는 생명을 느꼈고 그 생태를 관찰했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생명과 풀의 삶을 금빛 붓질로 한올한올 살려낸다.
그렇게 붉은 잎맥과 푸른 잎, 금빛 줄기들이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에 이끌려 형상을 만들어낸다. 폭포가 있는 신비한 풍경 속 덤불이었다가 하트모양이기도 하고 남녀의 형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가족사진의 한 장면을 이루다가 이내 다시 풀숲이 된다. 이러한 형상들은 작가가 오랫동안 작업을 하면서 개인사적인 굴곡과 인생에 대한 고민 등을 작품에 담으면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래서 시기마다 작품마다 형상을 이루는 풀과 함께 의미를 가진다. 그 의미는 그저 전체적인 형상으로만 설명되는 것도, 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풀만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성민우는 일견 풀숲이나 하트라 볼 수 있는 형상 속에 숨은 또 다른 형상을 넣어두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한 번의 바라봄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다. 화폭 속 형상은 명확하게 드러나는 듯 하면서도 이내 사라지고, 못 찾을 듯 하면서도 빛에 따라 반짝임을 달리하는 금빛으로 다시 또 다른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호함, 이를 성민우는 인간관계와 같다고 생각한다. 풀무더기들이 그저 자신들의 생태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고 뭉치고 갈라지듯이, 인간관계 역시 너무나 사랑하여 하나가 된듯하지만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간극을 가지게 된다. 가족 역시 그러하다. 하나의 덩어리인 듯하지만, 제 각기 자신의 색을 가진 풀더미로 남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떤 풀은 꽃을 피우고, 또 다른 풀은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벌레에 먹히고 상처를 입는다. 이렇듯 알 수 없는 인간관계처럼, 그저 자신의 삶을 살고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지만 명확하게 알 수 풀의 생태를 성민우는 그린다. 그리고 이러한 풀의 형상은 인간관계의 은유이기도 하면서 작가 자신의 투영이기도 하다.
성민우를 이를 초상(草像)이라 이름 짓는다. 어떤 사람의 인물형상을 말하는 초상(肖像)이 아닌, 풀의 형상인 것이다. ‘초상’이라는 동음이의어에서도 그러하듯, 성민우가 그린 초상은 인간의 모습이면서도 풀의 모습이기도 하다. 풀잎과 줄기가 얽혀서 만들어내는 인간의 모습. 그 모습은 사랑을 하기도 하고 한없이 외로워하기도 한다.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 개인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다. 마치 차가운 땅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싹을 틔운 풀이 우연히 만난 근방의 풀들과 어울려 살아가듯이 말이다. 이를 자연의 관점에서는 생태학(ecology)이고 인간의 관점에서는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민우의 풀그림은 이 둘의 관점을 회화로 관통하고 있다. 지구상의 생명들이 그물망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이는 인간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근본 개념에서 말이다. 그리고 이를 성민우는 최근작품에서 오이코스(Oikos)로 풀어낸다.
풀더미들이 이룬 오이코스는 더 이상 우리 발밑의 풀들이 아니다. 우리가 밟을 수 있는 미물이 아니다. 오이코스를 이룬 풀더미는 오히려 우리를 집어 삼킬 듯 군집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각자 자신의 위치를 갖는다. 화폭 속에서 저마다 앞으로 나오겠다며 아우성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어우러지고 있다. 오이코스는 생물학의 어원이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공적 영역인 폴리스와 구분되는 사적인 집단을 일컫는 이 말은 인간에게는 생물학적 기본단위인 가족을 포함한 정서적 그룹이기도 하다. 풀더미를 인간관계의 반영으로 표현한 성민우은 바로 이러한 풀의 오이코스를 그려내고 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생명
풀과 인간, 이는 성민우의 작품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두 가지 코드이다. 이는 하나로 결합되기도 하고 또 따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마치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처럼 우리에게 오기도 사라지기도 한다. 이는 성민우가 첫 개인전에서 비단에 나뭇가지를 그렸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전통적인 기법으로 그린 나무가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른 나무가 그려진 반투명한 비단을 통해 사람이 보이길 바랐다. 성민우에게 있어 나무와 풀은 인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