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밤, 산 한가운데 위치한 숙소를 잡았다. 바뀐 잠자리에 몸을 뒤척이다 밖을 나오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 속, 요란한 물소리가 사방을 휘감는다. 어둠으로 둘러쌓인 그곳, 커다란 물줄기가 나무 기둥들을 이리저리 타고 올라가 떨어지는 상상을 하며, 금방이라도 내 옷이 젖을 듯한 착각에 빠진다. 다음 날, 잠에서 깨 밖을 나오니, 숙소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작은 개울 하나가 있다. 어젯밤 들렸던 요란한 물소리 대신, 거의 들리지도 않은 소리를 내며. 내가 서있던 그곳은 어디였을까.
종이 위, 흰 물자국들이 흐드러진다. 언뜻 보면 모노톤의 물감이 흩뿌려진 듯 보이지만, 화면 위 검은 먹물만 남아있다. 마스킹으로 흰 여백을 가리고 먹물을 종이에 스민다. 수차례 먹물을 스민 후, 마스킹을 벗겨 흰 여백을 드러낸다. 흡수된 먹물과 드러난 여백은 종이를 스치는 손에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다음 날 사라져버린 그 물소리같이, 이미지는 존재하나 허공만이 남아있다.
혹은 캔버스 위, 검은 선을 긋는다. 물감은 종이에 먹이 스미듯 캔버스에 흔적을 남기고, 흐르는 선을 따라 화면 위 검은 선과 하얀 여백이 드러난다. 반복적으로 그은 선들이 만들어 낸 우연한 자취에 그날 밤, 그 숲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죽음과 삶을 가르는 경계의 모습으로 내게 다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