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작업의 정체성이다. 나의 역할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며 변화 중에 있다.
‘나’란 존재는 성장과정에서 경험한 타자의 욕망과 타자가
요구하는 규정화 된 의식 속에 갇혀 있다. 그러한 자아는 고착된 사유로 스스로 벽(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과 자유롭지 못한 부정적인 감정을
해체하고 긍정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위하여 내면의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의식의 해체는 작품에서는
형태의 해체로 나타나게 되었다. 벽에 갇혀 있던 자아는 해체로 새로운 영토를 향하게 되고 자신만의 재영토화
과정을 거치며 긍정적인 방향성을 지향하였다.
존재물음과 혼돈, 이에
따른 의식의 해체와 탈영토화 이후에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유이다. 작업하는 행위는 맞닥뜨려 벽을
해체하고 규정을 해체하는 행위이다. 유희적 성격의 즉흥성을 갖는다. 즉
작업행위에서 심리적(心理的) 치유행위인 정화의식(淨火儀式)을 경험하고 있다.
작품은 비서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데, 추상화도 아니고 추상표현주의도 아닌 ‘참된 닮음’을 추구하고 있다. 비재현성의 특징은 존재물음에 대한 내적 갈등과
고뇌의 흔적이다. 결국 작품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으며 ‘생성’을 추구하는 결과물이며, 광의적으로는 ‘자아’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다.
작품의 형상은 ‘되기’의 형상, 즉 무엇임의 경계를 확정짓는 영토화의 규정에서 벗어나 다른
배치 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을 거치는 ‘되기’의
형상이다. 어떤 것으로도 되지 않음으로 해서 특정한 정체성으로 제한되고 고정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 것으로 정체됨이나 한정됨 없이 지속적인 ‘되기’의 과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존재론은 부정의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있는 변화와 생성을 긍정한다.
무규정적인 혼돈은 중심에서 벗어나 있으며 정형화되지 않고
목적이 없으며 인과가 없는 세계다. 천지는 만물을 대하기를 어느 것에 특별히 좋게 대하고 어느 것에
특별히 나쁘게 대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 사이는 비어 있으나 힘은 끝이 없고 움직일수록 힘이 더욱 커진다. 혼돈은 유와 무를 초월하는 “생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 자체이다. 혼돈은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모든 감각기관이 없으므로 자유롭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 혼돈은 “되기”이고, 혼돈은 그저 무질서나 해체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생성의 힘과 근원을 의미한다.
혼돈을 해치는 것은 무위의 도를 어떤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고, 지식이나 지혜의 유한성이다. 지식과 지혜는 무한한 무위의 생명성을
해치게 된 것이다. 혼돈의 세계에는 어떤 질서도 이성도 없고 아무런
‘이치’도 없다. 아무 ‘이치’도 없는 혼돈의 세계야말로 세계 존재의 진정한 이치이고 그것이
도이다. 이 혼돈의 도의 세계는 차이 자체의 세계, 오직
차이로만 존재하는 세계, 어떤 규정도 없이 차이의 관계만 있을 뿐인 잠재성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러한 잠재성의 세계는 차이의 작용에 의해 현실계에서 유한한 재현적 세계로 나타난다.
‘Chaos(혼돈)’은 존재의 근원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