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고.
스민다.
2022년 갤러리 그림손 ‘최문봉 개인전’을 보며
피카소의 일화 중 냅킨에 그린 스케치의 이야기를 좋아한
다. 정확히 1분이 체 걸리지 않은 작품 제작 시간에 비해 그림 가
격이 너무 비싸다는 고객의 말에 “나는 이 그림을 그리는 데 40년
이 걸렸다."라고 말한 피카소의 그 명쾌한 대답이 참 좋다. 피카소
의 현답(賢答)은 작가의 창작방식인 화륜(畵綸)이 곧 그 작가가 살
아온 삶의 경륜(經綸)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작가의 작화 활동에
부여되는 시간 개념은 단순히 물리적 단위 개념을 넘어 작가 삶 전
반을 아우르는 하나의 조건으로써 작품에 투영되는 것이라는 의미
로 이해될 수 있다. 비약적이긴 하지만 이 일화는 마치 시간과 정
성으로 삭혀져 맛을 품어 때가 되면 드러나는 우리의 장맛처럼 느
껴지곤 한다. 그나저나 우리네 삶은 얼마나 더 삭혀져야 제대로 맛
을 낼까?
삶 또는 생이라는 단어의 교감영역에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개개인의 사람에게 부여되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각자만의 인식체계가 반영되게 된다. 즉 한 인간이 생을
기반으로 한 모든 사건(觸/event)에서 파생되고 누적된 인식이 반
영된 것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매우 주관적이며 개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수용될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 피카소와 고객의 경우에
서처럼 자기 삶의 영역에서 대상을 이해하고 그 기준으로 남을 판
단하게 되는 경우도 이러한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문봉 작가 작품 전반에 담겨있는 화두(話頭)이자 화두(畵
頭)인 ‘품다’라는 단어 역시 그렇게 느껴진다.
할미꽃 포자 형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작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품다’의 첫인상은 아이를 품고
(아이 밸
잉: 孕, 안을 포:抱) 있는 표상적인 의미와 느낌이 강하게 와닿는다.
식물의 열매속 씨앗처럼 할미꽃의 포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하고 다음 세대를 이어 가는 생의 한 단계로 이해된다. 그러니
유추하자면 작가의 생에서 어머니로서 살아온 그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묵묵히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단순
한 의미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거친 붓질이나 질
감과는 어울리지 않는 잔잔한 색의 중첩이나 가느다란 세필로 한
땀 한 땀 포자의 터럭을 그려내는 손길에서 말 못 할 무엇인가를 입
에 머금어 참고 견뎌내고(머금을 함:
含) 있는 굳은 침묵이 보이기 시
작했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지나왔던 삶의 시간대에서 여성에게
얹어지는 어머니, 딸, 아내란 무게가 그리 녹록하지 않았으리라 짐
작이 되건만 이 침묵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negative 적인 억누
름이나 압박과는 다른 결을 가진 듯 보인다. 멍하니 그림 속 포자를
따라 화면 위를 부유하듯 떠다니다 보니 눈물처럼 떨어진(落) 상흔
(傷痕)과 같은 번짐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는 ‘그리움(품을 회:
懷
)’을 품고 있었구나.”
‘품다’를 의미하는 한자는 앞서 설명하였듯이 여러 가지 글자
(孕, 抱, 含)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품을: 회(懷)를 많이 사용한다. 이
글자는 ‘생각하다’, ‘헤아리다’, ‘안다’, ‘품다’, ‘따르다’ 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글자의 태생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설문해자(說文
解字)에서 회(懷)자를 설명하길 "念思也"라 하였다. “잊지 않고 생
각한다.”라는 의미이다. 글자를 풀어(破字)서 이해해 보면 품을 회
(懷)"자는 마음 심(忄)과 그리워할 회(褱)자로 되어 있다. 글자의 발 음(聲符)이 되는 ‘그리워할 회(褱)’자는 옷 의(衣)와 눈 목(目), 물 수
(水)로 되어 있다. 상상해 보면 흐르는 눈물을 옷깃으로 닦는 모습의
형상이니 이는 그리운 마음에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이 된다.
‘그리움’
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거나 어떤 것이 매
우 필요하거나 아쉬운 감정이다.
이 단어 역시 부여된 사전적 의미보다 개개인의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훨씬 다양하고 주관적인 인식을 포함하고 있는 글자다.
감정은 나(我)를 기반으로 즉발(卽發) 하는 성향을 띄고 있는 반면
에 그리움이란 녀석은 다른 것들과는 다른 완만함이라는 속도로
가슴에서 배어 나와 존재감을 드러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쉽게
드러내지 않고 가슴속에 소중히 묻어두고픈 잔잔함 또는 참아낼 수
없을 정도로 아리지만 묵묵해지는 애잔함을 머금고 있는 것이 그
리움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이 ‘말 못 할 무엇인가를 입에 머금
어 참고 견뎌내고 있는(含) 굳은 침묵’처럼 보였던 것이리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결핍으로 인해 파생된 욕망은 인
간이 살아있음이 전제된 감정을 통해 발현되곤 한다. 작가는 자신
의 살아있음 또는 살아가고 있음을 포자라는 대체자를 통해 일상
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감정을 날것 그대
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 삶에서 체득된 비움이라는 자기만의 체를
통해 정제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가 말하려는 그리움은 걸러
진 감정의 씨앗 즉 삶을 머금고 있는 ‘생존의 포자’라 할 것이다.
또 이것이 작가의 심상적 화면 위로 정태(靜態)인 맹목적 함
구 즉 ‘침묵’이 아닌 동태(動態)로서 ‘헤아림’이란 승화된 가치로
스며 나오고 있다.
“순리대로 삶을 받아들이고 비우는 것”, “엄마의 바다는 나를
품고, 또 나는 아이를 품고 또 삶을 품고, 나는 바다가 되려 한다”라
는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삶을 닮아가는 일상 속 모든 감정을 그리
움의 원천이자 자양분으로 삼고, 회생(懷生)들과 연기(緣起)된 자
기만의 지각과 감각을 통해 순리적인 삶(生生之理)으로 환원시키
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다.
“그리움은 잘 삭혀진 맛이었지. 변화를 헤아리며 그 참맛을 기
억하는 것(常) 그래서 늘 그립고 또 그리워했구나, 우리네 인생, 이
그리움 덕에 아름다울 수 있겠다.”
삶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는 마음인 그리움, 여러분은 무엇을 그
리워하시며 살고 계시는지?, 이제 최문봉 작가의 그리움이 염원하
는 환원(항상: 常), 그 ‘품고 스밈’을 상상하며, 장씨(莊周) 할아버지
의 물고기(호량지변:濠梁之辨)가 생각나는 나만의 해석을 끝내고
작가의 맛난 말을 빌려 마무리해야겠다.
“(나는 누군가에게) 일상의 삶 속에서 감정의 사유를 통하여 품
고 스미는 긍정의 하얀 씨앗이란 선의적 의미로 환원되고 싶다.”
2022년 ‘亼’ 에서
장 태 영